시론

대한민국 단상!

호천 2020. 6. 29. 10:19

간사장  대한민국 단상


0.6%  Vs   1,265 건



2008년 한 대학교에서 실시한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이승만은 0.6%로 최하위 평가를 받았다.

그가 최초로 미국 땅을 밟은 1904년부터 하와이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던 1965년까지 뉴욕타임즈에 게재된 이승만 관련 기사는 1,265건. 

나라가 사실상 없어졌던 1904년부터 나라라고 하기도 어려웠던 세계 최약체, 최빈국시절이었던 1965년까지  이루어진  일이다. 주로 그의 개인적 역량에 관한 뉴욕타임스의 보도였다.

미국, UN을 비롯 전 세계에 엄청난 자취를 남긴 유일한 세계적 한국인 이승만.

지금도 자유민주주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친북  세력들이 대한민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해방직후 한반도는 100% 공산화될 운명이었다. 

당시 남한은  북의 지령을 받는 좌익이 압도적이었으나 더 큰 문제는  한반도 운명을 결정지을 UN에서도 소련의 영향력이 막강하였다는 사실이었다.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남한만의  정부 수립을 위해 유엔 임시 한국위원단 8개국 대표들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남한만의 선거를 제안한 미국 안에 찬성한 국가는 3개국에 불과했고 5개국은 부정적이었다.  인도  호주 캐나다 프랑스 시리아 대표들은 소련 측 주장을 지지했다. 대한민국은 탄생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의 탁월한 외교력이 빛을 발하였다. 대한민국은 탄생하였다.

1953.7 휴전협정에 따라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열렸던 19개국 한반도 통일문제 정치 회담에서 미국을 포함한 유엔 참전 15개국은 모두 북한의 입장에 동조했다.

특히 영연방 국가인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대표들이 강력하게 북한 안에 동조했다. 북한 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한민국의  사실상  해체를 의미했다.

이승만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휴전협정에 동의하는 대가로 이승만은 미국과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세계 최극빈국이 세계 최강 최대 국가와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조약으로 오늘날 대한민국 자유와 번영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1953년 8월 미 국무부 덜레스 장관이 한미동맹 조약 체결을 위해 서울에 왔다.   덜레스 장관과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과   프린스턴대학 동문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미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도 프린스턴대학 총장이었을 때 이승만과 가까웠다. 특히 그의 둘째딸 제시는 윌슨이 뉴저지 지사시절부터 이승만을 도왔었다.

이승만과 덜네스는 국가 이익 앞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극단적인 대립을 했다. 

북한의 남침이 있을 경우에만 원조를 한다는 미국의 주장에 대해 이승만은 한미 양국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자유 진영의 동맹국으로서 항상 미국이 한국을 원조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승만의 주장대로 미군 2개사단이  북한의 남침저지를 위해 한국에  주둔하고  한국군 20개 사단의 훈련과 각종 장비를 미국이 계속 지원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승만의 외교력으로 대한민국은 또다시 살아난 것이다.


국가는 너무나 약했지만 세계적인 지도자를 가질 수 있었던 신생 대한민국!! 이승만을 가진 것은 축복이었다!!


멸망으로  무너져 내려가던 조선말,
조선지배층은 청나라, 일본,러시아로 이리저리 줄을 데려했으나 모두 멸망만 가속화시키는 선택이었다.

오직 이승만은 영토적 야심이 없던 자유민주주의 국가 미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동맹으로 선택(?)했다. 

그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전파한 위대한 선각자였고 한평생 미국을 통해 대한민국의 발전을 모색한 전략가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미국에 순종하지 않았던 미국이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극빈 국가의 지도자였다.

  그것은 비참함과 처절함을 극복하고 스스로 얻어낸 최상의 학력(조지워싱턴-하버드 석사-프린스턴대학 박사), 비범하고 탁월한 친화력ㆍ외교력(5년 7개월간 한성감옥 수감시절  동료죄수 40여명 기독교 전도!!미국 선교사들은  몇 년 동안에도 단 한명도 전도 못함. 그 때부터 이승만을 주목)과  그것을 뒷바침한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가능했다.

해방후 미 군정 시절, 하지 미 군정사령관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한반도 문제 해결을  소련과 협조하려했으나 소련의 한반도 적화 야욕을 간파하고 소련에  결사 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하려했다.  심지어 해방후 미  국무부는 이승만이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 조차 협조하지 않았다.

너무나 강한 이승만이 미국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던 것이었다.

이승만, 국가의 미래를 제시하다.

해방 직후 80% 문맹률은 1959년 22.1%로 줄었다. 학생 수도 중학생 열 배 고등학생 3.1배 대학생은 열두 배 늘었다.  19개였던 대학도 63개로 늘었다.

이승만의 고급 인재 양성의지가 1953년 인하 공대 설립으로 나타났다. 하와이 교민들이 모은 돈으로 미국 MIT 공대와 같은 최고 수준의 공대를 설립하려 했다.

학교 이름을 "인하"로 한 것은 1903년 최초 미국 이민 출발지인 인천과 도착지인 하와이에서 한 글자씩 꾸어온 것이다 .

한미군사 원조협정에 따라 매년 천명 이상의 장교들이 미국에 파견되었다. 이승만은 1956년 경무대를 방문한 미국인 전기기술자 시슬러를 통해 장래  에너지는 원자력임을 알게 되었다.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고 농축우라늄 공급의 길을 열고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설치했다.

그리고 기술 훈련생들을 미국 아르곤 연구소에 파견했다.1957년 국제 원자력 기구에 가입하고 원자력연구소와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를 설립했다 .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약한 나라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국제적인 지도자를 갖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이승만  혼자 만들고 지켜낸  나라였다.

악랄한 공산주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내고  자유와 민주주의 토대 속  번영의 길로 이끌었던 지도자 이승만. 그는 그가 그토록 지켜내려고 애썼던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였다.

영국, 미국 등 민주주의 종주국들이 경제발전단계에 따라 100년 넘게 걸려 보통선거권을 부여했으나 이승만은 국민소득 50$도 안되고 국민 다수가 문맹인 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 기본권인 선거권을 전 국민에게 부여했다.

비판과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했다. 결국 그는 그가 최대한 허용했던 자유민주주의로 인해 쫓겨나게 된다.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책임지면서.....

그러나 그가 사라지면 꽃 필줄 알았던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그가 사라지고 30년도 넘게 이 땅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승만을 축출했던 비판과 집회,결사,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자유민주주의는 이승만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0.6% 라는 숫자의 의미!!

0.6%라는 숫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이승만 이란 지도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진정으로 아는 국민의 숫자  일 수도 있다.    전체 5000만 인구 중 1%가 50만  정도 되니 0.6%는 30만명 정도.

아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적을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飮水思源(물을 마실 땐 그 물의 근원을 알고)  食果問樹(과일을 먹을 땐 어느 나무에서 나온 것인지를 묻는다). 

대약진 운동으로 3천만명 이상 굶어죽고 문화혁명으로 몇 천만(사실상 중국에서 통계숫자는 무의미!)이 죽었지만 그것들을 주도한 모택동에 대해 후일 등소평은 “功 칠 過 삼”이러고 짧게 말했다.  아무런 격하 운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 돈은 오로지 모택동 단 한사람만 나온다. 중공(중국 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자이기 때문이다.

모택동이든 張三李四 이 잘한 것과 잘못이 있다.

문제는 근본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는 가에 달려있다. 나라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우리 국민의 99.4%가 이승만을 욕하고 비난한다 하더라도 단 한가지 확실한 팩트(사실)는 분명하다.  그가 없었으면 자유민주주의도 대한민국도 없었고 공산 조선인민공화국만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또다시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어떤 자들에겐 그 먹구름은 기회일 가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에는  절망에 더  가까울 뿐이다.

이승만   단상 후기


이승만은  피와 눈물로 썼다.

직접 읽고 확인된 것들만, 사실만을  썼다.

  기자는 아니지만 뉴욕 타임스 기자 못지않게 스스로 묻고 확인하며 최대한 사실에 근접해서 썻다.  내가 이승만을 공부하며 느꼈던 감동과 감격, 희망을 다른 이들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썼다.

아주 소수의 격한 동조ㆍ격려의  글 몇 개가  답글의 전부였다.  근거와 사실에 입각한  수준 높은 비판적 견해도 없었다. 예상대로 대부분 침묵.

엄연한 사실과 역사적 기록을 제시했으나 놀랄 만큼 담담하고 무감각한 반응에 내 자신이 더 놀라울 뿐이다.

크게 세 가지를 말하고자 했다.

첫째는 세 가지중 가장 중요한 실력,
둘째는 고마움,
셋째는  팩트 (사실)에 관해서이다. 



<실력에 대해서>

미국에서 단 몆 달이라도 학교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아는 사실이지만  명문이든 보통학교든  미국 학교에서 졸업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승만은 미국 사람들도 최소 12년 이상이 걸리는 과정(학부-석사-박사)을 5년 만에 마쳤다.  

이승만의 전공이었던  철학, 영문학, 국제법은 영어가 취약한 동양인들로서는 가장 힘든 분야들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미국인들이 사는  웬만한 중소도시에서는 이승만의 학력을 가진 미국인은 없었다.

국제법에 관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프린스턴대학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하였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제1차 대전 발발 당시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의 입장을 미 의회에서 연설 할 당시 이승만의 박사논문을 직접 인용하였다. 

그의 영어 능력은 지금 한국인들 중에서도 따라 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다.

국제법 학자로서의 높은 지성과  학문능력 역시 세계적이었으나 그것은 그가 가진 능력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통찰력, 판단력, 과단성,자기희생정신,추진력,돌파력,유머감각,설득력,논리력,분석력,발표력,문장력,  친화력,정신력,외교력....

  일국의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실력을 이승만은 지니고 있었다.


<감사에 대해서 >


  언젠가부터 고마움과 감사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 버렸다.

잿더미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세계 10위 권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을 모든 나라가 경이와 감동으로 바라보지만 우리는 이런 성장을 이뤄낸 기업인과 지도자들에 대해서 감사는 커녕 비난과 끌어내리려는 부정적 시각으로 가득하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를 피와 외교력으로 지켜낸 영웅,  국가의 힘이 아닌 이승만 개인의 힘으로 지켜낸 진정한 영웅에 대해서 아무도 감사하지 않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실ㆍ팩트의 중요성>

엄연한 역사적 사실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거짓에 바탕한 선동을  더 신뢰하는 우리 현실에 절망한다.

좋은 학벌, 최고의 자격증,  좋은 직장에 다니는 자들이 보여주는  반지성적 침묵, 생계형 무소신,

이승만을 얘기하면 극우반동 내지 수구꼴통으로 간주하는 한심하고 천박한 경박함에는 환멸을 넘어 가엽기까지하다.  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팩트는 쉽게 얻어 질 수 없다. 막연한 주장과 의견제시는 쉽지만 팩트를 얻기위해서는   힘든 과정을 필요로 한다. 팩트를  추구하고 획득하는  과정을 우리는  지성이라고 부른다.

상층부 지식인(?)들의 천박한 지성과 얕은 판단력은 공동체와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마치면서...


구호와 주장이 온 세상에 넘쳐난다.
선동과 비난도  세상을 가득 메운다.

그러나 어디를 살펴봐도 실력을 갖춘 자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세상의 미래는 구호와 선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미래는 오직 실력 있는 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실력 있는 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기리는 세상을 염원한다.


간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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