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국민만 바라보겠다"는 헌법재판소...

호천 2025. 1. 27. 21:27

‘국민만 바라보겠다’는 헌법재판소, ‘尹 방어권 보장’ 외면하는 인권위

“헌재는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하고 있다. 여야(與野)를 떠나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
 
지난 1월 7일 헌법재판소 공보관이 언론 브리핑 중에 한 말입니다. 이 뉴스를 접하고 귀를 의심했습니다.
 
정치인들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법관(헌법재판관 포함)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법관 개인의 정치적·이념적 신조(信條)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관으로서의 직업적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헌법 어디에도 법관에게 ‘국민을 바라보라’는 말은 없습니다. 흔히 언론이나 시민단체에서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판결’을 주문하곤 하지만, 그건 사법의 본령(本領)에서 벗어나는 주장입니다. 오히려 법관이야말로 ‘국민’을 바라보면 안 되는 직업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어느 유명 지식인은 “거리의 국민이 헌법이다!”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근대 헌법은 권력자의 자의(恣意) 못지않게 ‘거리의 국민’들의 한때의 격정(激情)에 국가가 흔들리지 않고 존속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특히 사법(司法)제도는 ‘거리의 국민’들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공들여 고안되었습니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것도 아니고 시험을 통해 선발된 ‘일개 판사’(이건 제 표현이 아니라 어느 민주당 국회의원의 표현입니다)들의 임기와 정년을 헌법과 법률에 규정하고, “법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刑)의 선고(宣告)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아니하며, 징계 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직(停職)·감봉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헌법 제106조 1항)고 규정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인민재판을 하겠다는 건가
 
그런데 그 자신 사법시험에 합격한 법조인인 헌재 공보관이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입에 올린 것입니다. 정말 황당했습니다. 그건 여론 재판을 하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인민재판을 하겠다는 뜻입니까? 그가 말하는 ‘국민’은 한남동과 광화문에 모인 국민입니까, 여의도에 모인 국민입니까? 일부 여론조사에 의하면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이 40%를 넘어 50%에 육박하고 있는데, 살살 눈치를 보다가 대통령 지지율이 50%를 넘으면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기각(棄却)하고, 밑돌면 인용(認容)하겠다는 건가요?
 
그 헌재 공보관은 헌재의 공정성에 대해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는 데 대해, “헌법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내리는 헌재 결정을 가지고 새로운 헌법 분쟁을 만드는 건 헌재를 만든 주권자의 뜻은 아닐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런 소리를 하려면, 그동안 ‘헌법 분쟁’을 헌재가 어떻게 처리해 왔는지부터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탄핵 재판들에 대해 헌재는 정말로 한 점 부끄러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 헌재는 기세 좋게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언했지만, 결정 이유에서는 헌법이나 법률 위반 사실을 조목조목 든 게 아니라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는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소리만 했을 뿐입니다. 실력 있는 법조인들은 박근혜 탄핵 결정문 얘기만 나오면 “창피해서 할 말이 없다” “그들이 그럴 줄은 몰랐다”면서 얼굴을 붉혔습니다.
 
지금 헌법재판관들이 ‘주권자의 뜻’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도 의문입니다.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재산 형성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당했어도, 이념적으로 편향돼 있어도, ‘내 편’이라는 이유만으로 문재인 정권이 무리해서 그 자리에 앉힌 사람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란 사범’의 인권은 외면해도 되나
 
윤석열 대통령이 체포되기 이틀 전인 1월 13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극복 대책 권고의 건’을 상정해 이를 심의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열릴 예정이던 인권위 전원위원회는 시민단체와 국회 운영위원회 야당 위원들의 항의로 무산됐습니다. 자칭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행동’이라는 시민단체와 전국공무원노조 등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을 짓밟는 내란 세력을 옹호하는 안건이 상정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권위 직원들도 합세했습니다.
 
이날 논의하려던 안건에 담긴 내용은

▲검찰·경찰·공수처장에게는 ‘윤 대통령에 대해 무죄 추정(無罪推定)의 원칙에 기초한 불구속 수사를 할 것’

▲헌법재판소장에게는 ‘윤 대통령의 방어권을 보장하고 심판 기간인 180일에 얽매이지 말 것’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근대 형사법의 기본 원칙인, 아주 상식적인 얘기들이었습니다.
 
그 인권위 직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내란 세력은 인권을 보호받을 수 없는 겁니까? 인권위가 외쳐온 ‘인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는 보장하고 누구에게는 보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요? 인권위가 정말로 인권의 옹호자들이라면, 설사 윤석열 대통령이 ‘인권을 짓밟는’ 흉악무도한 내란 수괴(首魁)라고 해도 그의 인권은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옳지 않나요? ‘내란 동조 반대한다’는 구호가 등장했던데, 그러면 그동안 인권위가 국가보안법 위반자들, 간첩 혐의자들의 인권을 열심히 챙겼던 것은 그들에게 ‘동조’해서였나요?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척결’ ‘내란 세력 발본색원’을 외치고 있습니다. 소위 ‘내란 세력 척결’ 과정에서 누군가가 인권을 침해당했다고 인권위에 호소할 때, 인권위는 그의 호소를 들어주는 것도 ‘내란 동조’라면서 외면할 건가요?
 
인권위 직원들이나 전직 인권위 관계자들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무죄 추정의 원칙과 정당한 방어권을 보장하도록 촉구하는 권고안에 반대함으로써, 그들이 주장해 온 인권은 ‘가짜 인권’이었음을 자인(自認)하고 인권위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무너뜨렸습니다.
 
‘직업적 책무’를 생각하라
 
민노총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더니 대통령 체포에는 진심을 다한 경찰, 잡으라는 비리 고위 공직자들은 못 잡고 있다가 법적 근거와 권한이 불분명한 대통령 내란 수사에는 득달같이 달려든 공수처, 법 규정과 관할 상 논란이 있음에도 공수처의 요구에 영장을 발급해 준 법원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 작금의 헌재, 인권위, 경찰, 공수처, 법원, 검찰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전체주의 국가로 가는 길을 닦는 부역자(附逆者) 노릇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미국의 역사가인 티모시 스나이더는 <폭정>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부정적인 본보기가 될 때, 직업적 책무를 다하는 것은 더욱 중요해진다. 법률가 없이 법치국가를 파괴하거나, 판사 없이 보여주기식 재판을 진행하기는 어렵다. 권위주의자들에게는 복종하는 공무원이 필요하고, 강제수용소 소장들에게는 값싼 노동력에 관심이 있는 사업가가 필요하다.”
 
“직업 종사자들이 그들에게 요구되는 윤리와 순간의 감정을 혼동할 경우, 그들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말과 행동으로 옮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법조인이나 관료 등 전문직 종사자들의 부역행위가 없었다면 히틀러의 나치는 그렇게 쉽게 독일을 전체주의 국가로 둔갑시키고 유대인 학살과 전쟁을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이제 윤석열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운명은 헌법재판관들과 ‘내란 사건’을 다룰 법관들에게 달렸습니다.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절차적 정의를 무시해 오점을 남기는 재판, 법리도 제대로 대지 못하는 부끄러운 판결은 하지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2025-01-22
배진영 편집장 

-옮김-